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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도로 체계화된 조선의 관료제도 놀랍다.

by 눈부신 오늘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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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기와집 한옥의 구조

조선은 고도의 중앙집권 사회를 지향했습니다.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를 뽑았고 그 관료가 될 사람들을 성균관이라는 국가교육 기관에서 체계적으로 양성하였습니다. 과거 시험의 폐해를 다루는 글들이 더 많지만 과거시험이 그렇게 경쟁이 치열했던 것은 과거시험 외에 다른 수단으로 관료가 되는 여타의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귀족이라고 아버지가 권력이 있다고 과거 시험 없이 관료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의 귀족 체계인 양반(문반과 무반)이라는 것이 바로 이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로 등용이 되어야 유지할 수 있는 신분 체계였습니다. 귀족 집안이라고 할지라도 3대째 관료가 등용되지 못한다면 사실상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환갑에 장수했다고 환갑잔치를 했던 것으로 보아 평균수명이 60년 안팎이었고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보통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연령대가 3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 오늘날의 사법고시, 행정고시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양반의 삶도 그렇게 부럽지만은 않습니다.

조선은 이렇게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관료를 지방의 모든 군현에 수령으로 파견했고 중앙에서는 체계적인 행정 제도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관료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룩한 결과로, 고려 시대부터 시작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층 정교화되었습니다.

조선은 장원(과거시험 1)을 비롯하여 과거 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인재들을 주로 청요직에 발탁했습니다. 청요직은 삼사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을 말하는데 사헌부는 관리를 규찰하고, 사간원은 언론 역할을 담당하고, 홍문관은 경연, 국왕의 공부를 주관하는 기능을 한 곳으로 관직은 낮지만 국가 운영에 관해 직언을 할 수 있었고 여론을 조성하는 중용한 직책이었습니다. 보통 삼사의 관원을 거쳐야만 판서, 재상 같은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인재를 국가 운영에 직언을 할 수 있는 곳에 배치하고 그곳에서 능력을 보인 인물이 국가의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니 왕정 시대에 이런 체계가 가능했다는 것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중앙 정치는 의정부와 6조에서 주관했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의정부에서 국정을 총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좌의정이 실세였다고 합니다. 6조는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조는 인사권을 관할하고, 병조는 군권을 관리했기 때문에 가장 위상이 높은 기구였습니다. 이것이 사극에서 좌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극본 쓰시는 분들이 얼마나 역사 이해 수준이 높은 건지 그냥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건지 사극 속에 그려지는 좌의정은 대부분 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그려지거나 깐깐하고 노련한 인물로 그려지곤 하는데 아주 어울리는 인물 설정입니다. 이외 호조는 인구 및 부역, 조세, 경제 문제 관리, 예조는 예법과 음악, 국가의 제사, 잔치, 외교, 교육 담당, 형조는 법률과 형벌 주관, 소송과 노비에 관한 일, 공조는 산림이나 연못, 기술자 관리, 각종 토목 공사와 수리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경복궁 앞에는 6조거리라고 하여 관료들이 그곳에서 경복궁에 오가면 일했습니다. 현재는 의정부 터가 복원 중에 있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500년 전 국가체계인 것입니다.

 

이 밖에도 국왕의 비서실 기능을 했던 승정원, 검찰 역할을 했던 의금부가 있는 데 왕권을 보좌하는 기구였습니다. 또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관리하던 한성부를 비롯한 여러 기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비변사라는 기구가 기존의 체계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비변사는 원래 외적의 침입 같은 국가 비상사태에 각 부서가 한꺼번에 빠르게 협력하여 빠른 결정과 조치를 내릴 수 있는 임시 기구였습니다. 처음 시작에는 변방에 중대한 사건이 생겼을 때만 활동하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모든 행정이 전쟁 수행에 직결되자, 비변사의 기구가 강화되고 권한도 크게 확대되었다. 이렇게 되자 국가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와 육조는 실권이 없어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비변사를 장악하는 붕당이 권력을 쥐고, 안동 김씨 같은 특정 성씨가 비변사를 통해 세도 정치를 펼치는 등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비변사는 대원군의 개혁정책으로 폐지되지만 조선의 세도정치가 가능하게 했던 요인을 제공했던 것이 임시적으로 국가 권력을 집중시켰던 비변사가 오래도록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봅니다. 모든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면 결국 부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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