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기록 문화유산으로,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도와 일자순으로 정리된 기록입니다.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도 존재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종과 순종의 기록을 빼고 《조선왕조실록》이라 부릅니다. 실제로 실록 기록에 일제의 압력이 가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는 고종을 유약하고 무능한 왕으로 기록하며 일제가 조선을 강제 침탈한 것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습니다.
실록을 편찬하는 이유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이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국왕은 도덕적으로 훌륭해야 하며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펼쳐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생활의 모든 것, 국정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이 기록돼야 하고 후대 왕에게 모범이 돼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채로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남겨야 하는데 잘못된 것을 보고 따르지 않으며 잘된 것을 배워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여성 사관을 두어 왕의 잠자리 생활까지 기록했을 정도였습니다. 실록은 사관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평소 국왕을 따라다니거나 각종 국가 사무를 지켜보면서 글로 기록합니다. 왕은 거의 24시간 사관과 함께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왕은 사관 없이 신하를 따로 만나는 일도 없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 왕만큼 극한직업도 없었던 거 같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의 왕의 수명이 길지 않았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나면 그 이유로 꼽는 첫 번째 이유를 과로사로 본다고 합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왕이 지켜야 하고 수행해야 하는 예법에 따른 일정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기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기록하는 사관과 함께한다는 것은 너무 부담되는 일이었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초 자료를 ‘사초’라고 합니다. 국왕이 죽으면 실록청을 만들어 편찬 작업에 들어가는데 왕은 자신과 관련된 사초를 열람하면 안 되고, 선왕 때의 기록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실록에 기록된 것이 모두 정확한 사실이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사관은 사실을 기록하되 사관의 의견도 별도로 남겼으며 국왕이 쫓겨나거나 특정 인물이 역모에 몰려 죽거나, 반정이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는 가운데 일부 수정되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부 그런 면이 있더라도 사관 한 명이 왕의 말과 행동을 사실대로 기록하도록 독립성을 지켜줬고 왕 자신의 기록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열람하거나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더 나은 왕도정치를 위해 후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이 전통이 무려 500년 가까이 지켜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어디에도 이렇게 치밀하게 오랜 기간 왕조사 전체를 기록한 문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농업국가였던 조선에 절기는 너무도 중요했기에 천문에 대한 각종 기록도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자연재해 등 새로운 관심사를 바탕으로 실록을 독해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왕조는 역사를 집착에 가깝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들여 기록한 실록이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후대에 잘 전달되지 못할까 봐 각 지방에 사고(실록을 보관하는 서고)를 여러 곳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등 4곳에 사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습니다. 이를 1603년(선조 36년)에서 1606년까지 전주 사고본 실록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다시 4부씩 인쇄하였습니다. 이것을 다시 춘추관·묘향산·태백산·오대산·강화도 마리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춘추관 실록은 이괄의 난(1624)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마리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의 피해를 보아 현종 때 보수하여 1678년(숙종 4년)에 가까운 정족산 사고로 옮겨졌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에 전라도 적상산 사고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각 사고의 모든 《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여러 차례 이곳저곳으로 옮기고 일본으로 가져가는 등의 만행을 보였지만 워낙 여러 곳에 많이 보관하고 있었기에 그 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켜져서 후대의 우리에게 잘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1기 신도시 용적률 500, 안전 진단 면제 발표에 대한 딴지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 제도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과 서원 (0) | 2022.11.30 |
---|---|
임진왜란의 배경, 전개, 결말 (0) | 2022.11.29 |
목판 인쇄술의 극치 고려대장경과 보관 기술의 극치 장경판전 (0) | 2022.11.29 |
해방 70년이 넘어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식민 사관 (0) | 2022.11.22 |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경복궁과 창덕궁 (0) | 2022.11.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