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복궁
조선 왕조의 정궁이자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화유산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여러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천도를 추진했고 결국 정도전이 새 나라의 수도 건립을 담당합니다. 정도전은 중국 고대의 관제를 기술한 책인 주례의 내용을 바탕으로 도성을 설계하려 했습니다. 이상적인 유교 국가의 상징으로 수도를 건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경복궁은 한반도에 지어진 도성 중 예외적인 형태의 건축물입니다.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지어진 궁궐이나 대규모의 건축물을 보면 지형에 의존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만들어진 데 반해 경복궁은 중국의 전통적인 도성 설계를 따랐습니다. 평지를 선택하여 땅을 고르고 근정전을 중심으로 각각의 건축물이 사각형 형태로 퍼져나가듯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경복궁은 근정전을 기준으로 앞쪽에는 관리들이 일하는 공간이 주를 이루고, 뒤쪽에는 왕과 왕실 가족의 공간인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경복궁의 왼편에는 종묘, 오른편에는 사직단이 있는데 이러한 방식도 고대 중국의 예법을 따른 것입니다. 초기 경복궁은 침전보다는 편전, 왕과 신하들이 국정을 논의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이 우세한 경향을 띠었습니다. 경복궁은 이성계의 의지와 정도전의 노력으로 탄생한 공간이지만 세종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세종만이 유일하게 평생 경복궁에서 성실하게 집무하면서 유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이 국왕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주로 집무를 봤습니다. 초기 경복궁은 오늘날과는 달리 750칸 정도로 소박한 규모였는데 이것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9천여 칸으로 복원합니다. 왕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복원했기 때문에 건축의 규모에서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고종도 경복궁에서 오랜 세월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 때 또 다른 수난에 직면합니다. 조선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을 가로막는 형태로 지어졌고 편의에 따라 일부 건물을 헐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995년 김영상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기념으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이보다 앞서 경복궁 복원작업 진행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으며 현재도 다 복원된 것은 아니고 복원이 계속 진행 중입니다.
2. 창덕궁
1405년 태종 때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고 불렸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이 재건하였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조선의 법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270여년간 조선의 주요 국왕이 창덕궁에 머물렀습니다. 조선시대 궁궐 중에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경복궁의 웅장함보다 조선 건축물의 대표적인 상징인 자연과 어우러짐을 느낄 수 있어 사계절 아름답고 정감 가는 공간입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창덕궁은 이런 자연과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과 타 궁궐에 비해 보존된 전각 비율이 높은 점을 들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경복궁이 유교적 이상을 담은 정도전의 작품이라면 창덕궁은 왕권 강화를 강조한 태종의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연과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살펴야겠지만 후원을 비롯하여 왕이 머물면서 누릴 수 있는 부분을 한층 배려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경복궁은 왕이 주로 일에 매진하도록 설계된 직장과 같은 공간이었고 창덕궁은 왕이 머물면서 일과 쉼을 함께 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창덕궁의 후원은 30만 제곱미터가 넘는 큰 공간으로, 주변에 울창한 숲과 후원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집니다. 후원은 창덕궁의 반절을 차지하는 공간으로 옛날에는 호랑이가 나오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부용지, 주합루 등은 산세와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그 아름다움이 인정되어 동아시아 3대 정원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외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무척 인기 있는 곳입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하루 정해진 인원만큼만 예약을 통해 입장할 수 있는데 그 예약이 너무 힘들어서 가히 예약 전쟁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창덕궁의 전각들이 다른 궁궐들 보다는 잘 보존되어 있다고는 하나 창덕궁은 오랜 기간 조선의 법궁이었고 많은 역사의 현장에 있었기에 잦은 화재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차례 소실되고 다시 짓고 소실되고 다시 짓고를 반복하다가 1917년 또다시 내전이 모두 전소되는 큰불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순조 황제는 새로 중건하기를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이미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총독부는 재정상의 문제를 들며 기존 경복궁의 전각들을 철거하여 그 자재를 이용해 공사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창덕궁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은 모두 경복궁의 건물 자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규모가 작은 창덕궁의 건물들 사이에 규모가 큰 경복궁 건물이 들어와 있어 약간 어색한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르면 안 보이는 부분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니 창덕궁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 부분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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