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에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최초의 근대 조약으로, 전체 12조로 돼 있고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일본이 필요해서 일본이 요구해서 만든 일방적인 한일 FTA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세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양 열강은 청나라를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더해 1868년에는 아시아 국가 최초로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근대국가로 나아갑니다. 이 와중에 조선에서는 세도 정치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이어지다가 1873년 고종이 직접 통치하면서 개화 정책에 나서게 됩니다.
이 시기 일본은 부산에서 함포 사격 연습을 구실로 간접적인 위협을 했고, 운요호 사건을 일으킵니다. 일본 배 운요호가 강화도 연안 포대를 도발한 후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조약을 강요했는데 이는 당시 서양 열강이 했던 전형적인 수법이기도 하였습니다.
여하간 개화 의지가 있었던 조선 조정은 전권대신 신헌을 보내 강화도 연무당에서 부산과 원산, 인천 등을 개항한다는 내용을 담은 조약을 체결합니다. 당시 조선은 강화도 조약이 수백년간 있어왔던 일본과의 통상적 교역을 문서화 하는 정도로 이해했던 듯 합니다. 당시 통역관들이 주로 개화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조약에는 일본의 악의가 숨어있는 독소조항들이 담겨있었는데 그것은 ‘1조 조선이 자주국이다. ‘라는 조항인데 얼핏 들으면 우리나라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 같지만 당시 우리나라와 사대관계에 있던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됩니다. 다음은 7조로 안전한 항해를 위해 해안 측량권을 허락하는 내용입니다. 1조에 조선은 자주국이라고 말해 놓고 자주국의 해안선을 다른 나라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측량을 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조선의 복잡한 해안선, 국가 영토의 기밀이 일본에 전면적으로 공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조에는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허락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심판은 일본에서 한다는 내용입니다. 서양 열강에 못된 것만 배운 일본이 빌미를 잡아 체결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고 이는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조약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반대합니다. 반면 오경석 같은 개화파는 통역관으로 참여하여 막후에서 조약 체결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같은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또한 이 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의 첫발을 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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