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왕릉의 위치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릉’이라 부릅니다.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은 ‘원’이라 부릅니다. 그 외의 모든 무덤은 그냥 ‘묘’입니다. 조선 시대는 총 42기의 릉이 있는데 2기는 북한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한에 있습니다. 이는 왕릉의 선정 위치 때문입니다. 유교 사상에 근거하여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예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기에 일단 국왕이 다녀오기 편한 곳이어야 했습니다. 하여 도성(한양 지금의 서울)에서 멀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풍수적으로 길지여야 하였기에 입지 선정이 아주 까다로웠는데 길지를 선정하기 위해 도성에서 약간씩 멀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입지 선정 기준으로는 눈에 잘 띄면 안 되었고 주변 시설과도 거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여 왕릉 주변에 백성들이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람이 잘 들어야 하는 등의 조건을 갖춘 여러 곳을 풍수 전문가와 수없이 상의 후에 아들인 후대 왕이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 왕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선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 조선 왕릉이 모두 보전된 이유
조선 시대 왕릉은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단 한 기도 소실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구조가 눈에 보이는 봉분(동그란 흙더미)아래에 단단한 두께의 석실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도굴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글에서 밝혔듯이 조선 왕조의 집착에 가까운 기록 문화 때문에 무덤에 어떤 부장품이 들어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선의 왕들은 사치스러운 것은 국왕의 본분을 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검소와 근면을 강조하는 삶을 살았기에 피라미드나 신라 왕릉 같은 화려한 부장품을 무덤 안에 넣지 않았고 무덤 또한 화려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왕릉별로 왕릉을 지키는 참봉이라는 하급 관리를 두어 왕릉을 계속 지키고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조선 말기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조선의 묘는 쉽게 도굴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도굴에는 실패하였지만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이 척화사상을 갖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평생 유학 사상을 공부하며 인간의 도리와 예의, 특히 조상에 대한 공경을 다 하는 것을 중요한 사람의 덕목으로 믿고 살아온 흥선대원군의 입장에서는 무기를 끌고 와서 교역하자고 하고 조상의 묘를 도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서양인들이 그저 유학의 도를 모르는 미개인으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의 척화사상으로 우리나라 근대화가 늦어졌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과연 그 당시 교역하자고 온 서양 상선과 준비 없이 교역을 시작했다고 과연 우리나라가 빨리 근대화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3. 왕릉의 건축물
조선 시대 왕릉은 종묘나 궁전, 사직단과 함께 조선 왕조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구축물의 하나입니다. 특히 왕릉의 경우에는 왕이 승하하고 나서 5개월 안에는 반드시 그 조성이 완료되어 왕의 시신을 그곳에 안치해야 했습니다. 왕이나 왕비 또는 왕세자, 왕대비가 승하하면 궁궐 안에 빈소를 차려놓고 정성껏 제사를 모신 다음, 5개월 동안에 왕릉의 터를 결정하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가장 좋은 석재와 목재를 수집하여서 봉분을 꾸미고 봉분 주변의 석물을 조각해서 배치하고 정자각을 비롯한 비각, 홍살문 재실 등을 지어냈습니다. 건물, 돌길, 비석 하나하나 의미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기에 공사 과정은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할 수 없는 정확하고 신속한 작업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보통 국상이 선포되면 당시의 좌의정(左議政)이 국상을 총괄하는 총호사(總護使)가 되었고, 판서(判書)들이 각 도감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후 최고로 숙달된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갖춘 기술자들이 왕릉 조성에 동원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의 중요한 공사에 투입되는 기술자들을 관리해 왔으며 이들은 궁궐이나 종묘를 비롯한 왕릉조성과 같은 공사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였습니다. 종종 이름난 목수는 비슷한 시기에 궁궐의 건축공사와 왕릉의 공사는 물론 왕실의 사당 건축공사에 종사하여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였고 궁궐의 목수로 알려진 이들의 이름은 각종 왕실 기록물에 남아있어서 후세에까지 그 명성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조선 시대 행정이 법도에 따라 얼마나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역사해설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 조선 시대 왕릉에 대한 자세한 해설도 들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산림이 우거진 곳에서 느긋하게 산책도 할 수 있으니 추천하는 휴일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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