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와 통신이 발달하여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사람과도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한글 타자의 사용의 빈도는 오히려 더 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아직도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한글이 얼마나 많은 위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진 것이라는 것을 세상에 더욱 알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느 나라에 살고 있나 의심스러워지는 요즘 중심을 잡기 위해 더욱더 공부합시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른 시절부터 한자 사용이 활발했고 중국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도 대부분 한자를 활용하였습니다. 한자가 엄청나게 뛰어난 문자였다기보다 그 당시 문자를 가진 문명이 중국뿐이었기에 사용했던 것이고 발달한 문명을 받아들이려면 그 나라 말을 알아야 하는 것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를 우리가 힘들여 배우는 것과 같은 이치겠습니다. 하지만 각 나라들의 언어가 달랐고, 한자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배우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습니다. 각 나라들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한자 사용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벌어졌습니다. 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티베트족 등이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자들은 여러 문제로 인해 지속해서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때 설총이 이두 문자를 만들었는데 조선 후기까지 활용했습니다. 한자의 음과 뜻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우리말에 덧입히는 형태인데 하급 관리들이 이를 배워 실무에 활용했습니다. 일본어의 히라가나나 가타카나도 이런 한자 체계를 응용하여 만들어진 문자입니다.
한글은 이러한 동아시아 흐름 가운데 매우 독창적인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한자와 동아시아 전통 사상을 반영했습니다. 글씨가 사각형의 틀 안에 쓰인 것이나 자음과 모음이 알파벳처럼 나열되지 않고 한자에서 변, 방처럼 붙어 사용되는 것이 한자의 영향입니다. 또 모음이 천, 지, 인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은 동양의 문화적 전통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 등과 같이 소리글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한자와 다릅니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따서 자음을 만든 것도 흥미롭지만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하여 지금까지 자기 나라 글이 없는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에서 한글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다고 합니다.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그대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은 세계 어떤 나라의 말도 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한글이라 부르는 한글의 정식명칭은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는데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입니다. 해례는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며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입니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이라 부릅니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분은 무척 간략해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도 실려 있어 전해져 왔지만, 한글 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는 해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정본이 1940년에야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드디어 해례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중에게, 그리고 한글학회 간부들에게 공개된 것은 해방 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해방 이후 해례본이 공개된 것은 바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내선일체, 황국신민, 창씨개명, 일선 동조론, 신사참배 등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그중 가장 악랄했던 정책은 우리 말과 글에 대한 탄압 정책이었습니다. 1942년 12월 일본어 사용에 반하여 한글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의 임원 33인을 투옥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발했고 이때 이윤재, 한징과 같은 사람은 옥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나라를 끝까지 통치하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간송 전형필 선생은 김태준이라는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국문학자로부터 해례본의 실존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에서 발생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였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은 일제로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간송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대명사였고 김태준 역시 일제로서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송은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는 데 사활을 걸었고 눈물겨운 노력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체가 간송의 품으로 왔으며 비밀리에 지켜오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불러 한글 연구를 위해 영인본을 만들며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언어 한글이 인체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었고 백성을 위해서 기획적으로 언어를 창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특히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최초의 언어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그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그리고 창제의 세계관을 동시에 밝히면서 제작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진기록임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2년 12월 해례본은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현재 보수 중이라고 하는데 보수가 끝나면 꼭 보러 가야겠습니다.
이렇듯 한글이 지금처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근대 민족주의운동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주시경을 중심으로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한글 연구의 기초가 이루어졌고 조선어학회가 등장하여 오늘날과 같은 한글 연국의 기초가 이루어졌고 조선어학회가 등장하여 오늘날과 같은 한글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 등 현재의 여러 용례 사용 등은 조선어학회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이를 계승한 한글학회가 한글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부분에서 보면 영화 <말모이>가 얼마나 역사고증을 해서 만든 영화인지 알거 같습니다. 감동과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말모이>라는 영화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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