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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붕당정치와 탕평에 대한 재해석

by 눈부신 오늘 2024.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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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정치 문화 붕당 정치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숙종 때 제기됐고 영조와 정조 때 적극적으로 추진됐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북인, 남인, 노론, 소론 등 사림파는 각양각색으로 분화됐고 시기에 따라 대북, 소북 청남, 탁남 등으로 끊임없는 분열 양상을 보여 왔습니다. 숙종은 신하들이 파당을 짓고 갈등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봤으나 왕권 강화를 위해 오히려 신하들 간의 다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환국이라는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시도하였습니다. 인헌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숙빈 최씨로 이어지는 숙종의 유명한 로맨스는 단순 왕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서인에서 남인, 다시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권력 교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숙종의 환국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하고 남인과 소론이 몰락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특정 붕당에 권력이 집중됐고 영조는 이를 해결하고자 본격적으로 탕평책을 추진합니다. 오늘날에 전해지는 탕평채라는 음식은 영조가 신하들에게 탕평을 제안하며 내린 음식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집권 초기 소론이 주도한 이인좌의 난을 겪은 후 영조의 의지는 한층 강화됩니다. 영조는 계붕당, 계사치, 계승음을 통치 이념 3대 원칙으로 여겼는데 무엇보다 붕당 정치를 경계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을 보통 완론 탕평이라 부르는데 각 붕당의 온건파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정치현장

이에 반해 정조의 탕평책을 준론 탕평이라 합니다. 영조 집권 말기 탕평파가 형성되는 등 붕당 정치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부작용을 낳았고 사도 세자의 죽음을 두고 벽파, 시파 같은 새로운 파당 정치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각 붕당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인사들을 등용하여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쟁명하며 합의를 구하고 본인의 의사를 관철해 가는, 더욱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유학을 공부하고 4년에 한 번, 30명 뽑는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대신들을 상대로 토론하고 쟁명하여 합의를 구하면서 왕이 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해 가는 과정을 해나갔다는 말에서 조선시대 정치수준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영조보다 정조에 대한 평가가 높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조가 받았을 업무적 스트레스 또한 가히 짐작됩니다.

결국 정조가 일찍 승하하게 되면서 후계가 준비되지 않았던 조선 후기 왕조는 세도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안동 김씨 같은 소수의 문벌 가문이 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조선은 쇠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영·정조 시대에 탕평을 위한 노력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조선 후기 다방면에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조선이 삼정이 문란해지고 조선 정치, 행정의 다양한 체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된 것은 붕당정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한 집단에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면서 생긴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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