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진사대부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고려 말에 유입되었습니다. 고려 말 공민왕은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하여 고려의 교육 기관을 개혁하려 하였습니다. 성균관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관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공민왕은 성균관을 통해 훌륭한 관리를 양성하고 그들을 통해 부패한 고려를 개혁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에 이색은 유학 사상의 새로운 조류인 성리학을 가르치며 100여명의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이들을 신진사대부라 하는데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고 여겨지는 정몽주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킨 정도전이 모두 이 신진사대부에 속합니다.
2. 정도전
정도전은 공민왕 9년에 과거에 합격한 후 성균관 박사, 태상 박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습니다. 당시 원나라가 중국에서 밀려난 후 몽골 지역은 북원이 되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들어서는 등 국제 질서의 혼란기였습니다. 이 와중에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북원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했고, 정도전 등의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중원에 떠오르는 강자이자 성리학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명나라와 화친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세력은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정도전은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나주에서의 유배 생활 후 고향에서 야인 생활을 하는데, 정도전은 이때 진정으로 일반 민중의 삶을 체험하며 혁명가로 거듭났다고 추정됩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개경 출입은 금지됐고 여러 차례 인재 양성을 시도하지만 그 또한 실패합니다. 결국 좌절의 연속 끝에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갔고 그와 평생의 우의를 쌓게 됩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9년간의 격렬한 정치 투쟁 끝에 조선 왕조를 세웠고 1398년 이방원에게 암살당하기 전까지 약 6년간 건국 사업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조선경국전》을 집필하여 법의 근거한 통치 문화를 만들었고, 《고려국사》를 집필하여 조선 왕조의 역사적 당위성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통해 당시 부패한 불교가 아닌 성리학을 통한 국가 운영의 정당성을 설파했습니다.
수도 한양을 설계한 것은 물론 진법을 편찬하여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고 무엇보다 재상 중심의 통치를 주장하며 왕이 아닌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된 신하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설계하였습니다. 하여 우리가 보통 조선을 왕조 국가라고 알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철저한 체계 속에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고 애민 사상으로 무장된 왕을 성리학의 윤리로 무장한 신하들이 보필하여 운영되는 나라였습니다. 왕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고 신하 또한 성리학의 충 사상에 근거하여 왕에게 충성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왕에 의해 위태롭다고 여겨지면 신하들은 힘을 모아 왕을 몰아내었는데 조선 역사 속에서 이런 반정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반정이 옳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왕조 국가인 조선이 왕 하나로 좌지우지되는 나라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나라 체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 정도전입니다.
3. 태조 이성계
한 나라를 새로 창건하는 데에는 머리에 해당하는 신진사대부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고려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러 개혁파 신진사대부에게는 나라를 새롭게 건설함에 무력이 필요했고 이것을 담당한 것이 바로 이성계입니다. 이성계는 함경도 출신에 5천명의 사병을 거느렸던 지방의 실력자이자 활쏘기가 출중했던 탁월한 무장이었습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국가 운영에 근본적인 위협이 될 정도로 심각하였습니다. 고려는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외세의 침략이 많았던 시기입니다. 심각한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성계는 최영과 더불어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홍건적에 의해 점령된 수도를 탈환하는 전투, 원나라 장수 나하추와의 전투, 공민왕을 몰아낼 목적으로 원에서 보낸 덕흥군과 1만 군사를 격퇴하는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 우왕 3년 경상도와 전라도 내륙까지 쳐들어와 큰 피해를 준 왜군을 무찌른 황산대첩의 주역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밖에 여진족 호바트의 군대를 무찌르는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같은 시기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하고 집권 후반기에는 실정을 거듭하게 됩니다. 우왕 대에는 사회가 더욱 혼란해지면서 최영과 이성계 같은 신흥 무인 세력의 영향력이 강화됐고 이성계는 결국 정도전 등이 이끄는 신진사대부와 연합하여 조선 왕조를 창건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덕이 있는 장수로 불리었으며 국왕이 된 이후에도 이런 모습은 계속됐습니다. 아마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했던 것은 전쟁의 참혹상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고려말 고려의 상황으로 중원의 새로운 강자 명나라와 전쟁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줄지를 알았기에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이런 이성계는 사람을 한번 신뢰하면 든든히 뒷받침을 해주는 리더십으로 혁명파의 많은 인재가 조선 개국 전후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해줍니다.
이성계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산전수전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고, 조선 오백년 역사의 태종이 되는 큰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아들 이방원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아들 이방원에 의해 자신이 사랑했던 측근들과 친족들을 잃자 아들과 대놓고 갈등 노선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태상왕 자리에 물러나고 나서는 조용히 곳곳을 유람하며 말년을 보냈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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