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조에 대하여
영조는 조선 21대 국왕으로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재위했습니다. 조선의 왕들이 대부분 단명한 것에 대비해 영조는 장수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영조의 철저한 성격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영조는 철저한 금주론자였습니다. 술은 사람의 기질을 혼탁하게 만드는 광약이라고 여겼습니다. 심지어 제사상에 오르는 술조차 식혜 등으로 대체했고 전국적으로 금주령을 실시하여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금주령은 조선 시대 때 자주 시행되었습니다. 술이 백성이 먹어야 하는 곡물로 만들어지는 이유와 백성이 농사일에 게을리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막기 위해 대부분 농사와 관련한 일시적인 조치였는데 영조는 의지를 갖고 꾸준히 추진합니다.
영조의 검소함 또한 유명합니다. 정조가 지은 《영조행록》에는 “왕은 천성이 검소하여 어린 시절부터 비단옷을 입지 않고 명주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입은 옷은 여러 번 세탁한 것이 많았고 심지어 솜이 튀어나온 것들도 간혹 있었다. 드시는 반찬 역시 늘그막까지 몇 가지 안 되었지만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만약 보통 때보다 그릇 수가 더 있으면 왕께서는 거절하고 들지 않았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런 영조는 왕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집요하게 배격했습니다. 수입 제품과 사치품에 의존하던 삶을 지적하면서 소박한 국산품으로 채우려 노력했고 그로 인해 왕실과 사대부의 생활 양상도 검소하게 많이 바뀌었습니다. 여성들이 머리에 얹었던 가채 문화도 영조에 의해 배격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사극을 보면 조선시대 궁중여성들의 머리 모양에 가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조는 《속대전》을 편찬하고 엄격한 삼심제도를 실시했으며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는 등 사법제도 개혁에 관심을 높였습니다. 또 불합리한 세금 집행을 개혁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였습니다. 균역법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내는 세금의 일종인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해주는 정책으로 당시 여러 반대에도 영조는 백성의 삶을 살피고자 개혁을 실행하였으나 군포를 내지 않으려고 편법을 쓰는 세력 있는 양인들과 원래 군포를 내지 않는 특권 계층인 양반들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는 데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이 당시 계속 문제가 되었던 군포의 문제는 계속 해결되지 않고 철종 대에 이르러 더욱 심각해져 농민 반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때 군포를 1필로 감해주는 파격적인 개혁정책은 너무도 옳은 정책이었으나 편법을 쓰는 양인을 색출하고 녹봉이 많은 고위 관료들이 솔선수범하여 군포를 내게 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므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2. 정조에 대하여
정조는 조선 22대 군주로서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정신 이상증을 앓았던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출신의 큰 결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학문과 무예에 모두 출중하여 세자로서의 흠결을 잡기 어려웠기에 대왕대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지지로 국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국왕이 되는 과정에서 붕당 간의 갈등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국왕이 된 그는 일생동안 적극적인 탕평 정책을 통해 붕당 간의 대화를 모색했습니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와 활쏘기에 힘썼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대단한 독서가였던 정조는 왕실 도서관 정도의 기능을 하고 있던 규장각을 개혁하여 정조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 개혁 인사들을 길러냅니다. 규장각에서 이 개혁 인사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정책들을 연구해나갑니다. 또한 당시 입신양명의 기회가 막혀 있던 서얼들도 재능이 있다면 인재로 등용하여 기회를 줍니다. 대단한 독서가이며 왕실 도서관에서 다양한 개혁 정책들을 연구했던 이 모습은 마치 세종대왕과 닮아있습니다.
정조는 중앙 집권을 강화하면서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쳤습니다.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들었고 지방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서 지방 통제력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수원화성을 건설하였는데 농민들을 강제 부역시키지 않고 임금을 지급하면서 도성을 건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약용이 거중기나 배다리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활약하기도 합니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설한 것은 왕권 강화를 위해 새로운 천도를 꿈꿨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조가 영조만큼 재위 기간이 길어서 규장각에서 연구되는 각종 개혁정책을 차근차근 시행하고 정말 천도하여 올바른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정조의 짧은 재위 기간으로 어린 순조가 즉위하게 되고 이후 조선은 외척 세력 가문이 득세하는 모든 왕조 역사의 쇠퇴 수순을 밟게 됩니다.
최저가 항공권 예매 조회법(공짜로 나라 하나 더 가기)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건국의 주역 - 정도전과 이성계 (0) | 2022.12.13 |
---|---|
외환위기(IMF 사태)-다시 올까 정말 무섭다 (0) | 2022.12.12 |
역사 속 숨겨진 여성 독립 운동가 (0) | 2022.12.06 |
제주 4.3 사건(개정 역사교과서 학습요소에서 배제 위기) (0) | 2022.12.04 |
대통령 김영삼의 두 가지 선택에 대한 안타까움 (0) | 2022.12.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