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얼마 전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우리나라 현대사에 굵직한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김영삼이 두 가지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입니다.
1. 정치인 김영삼
김영삼은(1927~2015)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이었고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입니다. 국회의원을 아홉 번 하면서 반독재 투쟁을 주도했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래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이 됩니다.
김영삼은 1954년 26살에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960년대 후반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야당 혁신의 견인차가 됐습니다. 최연소 원내총무, 최연소 야당 총재가 되는 등 김대중과 더불어 가장 신망받는 정치가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선명 야당을 외치며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23일 단식투쟁,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천만인 서명운동 등을 주도했습니다.
2. 6월 항쟁 후 김대중과 단일화를 하였더라면
젊은 대학생들이 죽고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6월 항쟁으로 체육관에 숨어서 정권 잡은 사람들끼리 대통령을 뽑던 시대가 가고, 드디어 국민이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직선제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는 일단 야당 대표만 되면 대통령이 되는 것은 거의 확실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 선거에 나온다면 반대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위험성이 컸습니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라는 야심에서는 욕심이 가득했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의 협상에 들어가지만, 결국 단일화 협상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국민들이 단일화를 열망하였지만 두 야심가는 끝내 단일화하지 않으므로 국민들이 피땀으로 떠먹여 준 문민정부 수립의 기회를 놓칩니다. 지금 와서 누가 포기했어야 했느냐는 그저 쓸데없는 가정이라 할 수 있지만 6월 항쟁을 이끌었던 국민대표들이 김대중으로 단일화를 원했고 대통령에 낙선되고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대중이 이끌던 평화민주당에 밀린 것으로 보아 민심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회고록에서 나라도 양보했어야 했다고 김영삼 본인이 말했듯 김영삼이 포기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개인적 아쉬움이 있습니다.
3. 1990년 3당 합당하지 않았더라면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밀려 제2야당 총재가 된 김영삼은 또 한번의 파격 행보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3당 합당입니다. 3당 합당이란 1990년 당시 집권당이자 노태우 대통령이 이끌던 민주정의당, 박정희 정권을 계승하는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말합니다. 젊고 개혁적인 야당 정치가로서 평생 비판하던 정치인들과 손잡은 것입니다. 이로써 김영삼은 1993년 드디어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민정부로서 초기 각종 개혁 정치를 통해 지지율이 90%를 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전면적 지방자치제, OECD 가입,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추진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전두환·노태우 재판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함으로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을 제거한 것이 여전히 업적으로 회자됩니다.
하지만 군부독재 세력과 결탁해서 세운 정부의 개혁 정책이 일관된 태도를 가지고 추진될 일은 만무하였습니다. 자기의 지지기반이 군부독재 친일매국노 세력이니 본인은 원해도 계속 원하는 만큼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영삼은 대통령은 되었지만 스스로 자신의 입지를 좁힌 것입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 하면서 친일 매국노 잔재 청산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건물이나 때려 부스고 지명이나 바꾸고 전두환·노태우의 재판은 오랫동안 하였지만 두 명 모두 2년도 채 감방 생활을 하지 않고 석방되었으며 수백 명의 자국민을 죽인 전두환은 평생 사과 한마디 하지 않다가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습니다. 개혁은 꾸준히 체계적으로 추진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무분별한 개방정책은 결국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좀 더 정부가 경제 부분에 유능했다면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하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또 하나의 쓸데없는 가정을 해봅니다. 외환위기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던져져 그 시기를 온몸으로 겪은 이 나라 국민으로서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1기 신도시 용적률 500, 안전 진단 면제 발표에 대한 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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